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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성(聖)이란 1)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함(=신성), 2) 종교의 본질을 규정하는 독자적인 성질이나 가치.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 또는 신성(神性)의 숭고함이나, 그 능력 및 그에 대한 접근 불가능함을 나타낸다. 반대로 속(俗) 즉, 속되다는 1) 고상하지 못하고 천하다. 2) 평범하고 세속적이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 사전적 의미로 보았을 때, 성이란 특별하며, 평범하지 않고 독자적이며 인간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는 종교적인 숭고함, 초월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반대로 속이란 평범하고 천한, 우리가 일상과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을 나타낸다.
필자는 성을 절대자의 눈, 곧 다른 차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광대한 자연에서 그리고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일구어 놓은 사회와 문명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고 허황함, 우울, 외로움 등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더 큰 것과 더 많은 것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동물로서 다수가 옳다는 것을 따르려는 모습이 인간의 본성이다. 즉, 인간은 다수가 좇는 속된 것을 좇게 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 끝없는 욕망을 충족하면서도 느끼게 되는 허황 감, 무기력함을 직면하게 된 인간은 더 큰 존재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이미 존재해 있는 성스러운 존재, 신을 더듬어 찾아내게 만든 것이다.
즉 인간은 속, 자신이 살아가던 일상과 매일 집중하던 것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에 집중하고자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이다. 성은 내가 바라보던 나의 편협한 시각, 눈에서 벗어나 절대자의 눈으로, 다른 차원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며 고찰하게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내려놓게 되고 성이 주는 평안함과 희락에서 태초의 안락함을 경험하게 된다. 속이 줄 수 없는 성의 안락함과 평안은 성과 속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보이는 것, 속의 것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닌 성의 것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어로 성스러움(das Heilige)은 온전하게 하다, 치료하다(heilen)라는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 ‘heilen’은 상한 것, 상처 난 것을 다시 온전하게 만듦을 의미한다. 따라서 온전한(heil) 상태란 본래의 원상태이며 더 나아가서는 어떤 것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뜻한다. ‘heilen’은 온전한 원상태로의 회복 혹은 그것이 놓일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이끌어 줌을 의미하는 것이다.[1]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속에서 벗어나 성의 상태로 도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성스러움은 인간을 원상태로, 온전함으로 이끌어준다.
현대의 사람들은 속이 주는 다양한 기쁨에 빠져, 인간 자신의 시각에 국한되어 성을 등한시하고 있다. 그러나 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인간들은 속에 집중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며, 온전한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엘리아데의 성스러운 공간
엘리아데는 ‘본질이 존재를 앞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우주는 신의 창조물이고, 세계는 신들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기에 성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적 인간에게는 모든 세계가 성스러운 세계이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의례를 통한 성스러운 공간의 건립을 설명하고 있다.
엘리아데는 성스러운 공간을 설명하는 데에 앞서 ‘세계’에 대한 개념을 검토하였다. 전통 사회는 그들이 사는 영역과 그 영역을 둘러싼 미지의 불확정적인 공간이 대립한다고 여겼다. 즉 그들이 사는 영역은 ‘(우리의)세계’이자 ‘코스모스(우주)’이지만, 그렇지 않은 공간은 ‘다른 세계’이며 이질적인 혼돈의 공간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신들에 의해서 정화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신들의 세계와 교류하기에 하나의 코스모스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세계’는 성스러운 것이 이미 현현하고 있는 우주를 의미하며, 실재가 그 모습을 나타내는 공간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 장소를 정화하는 의례를 행하는데, 이는 성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러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우주화(cosmicization)의 사례는 서구의 개척자들뿐만 아니라 토착 원주민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그는 또한 아킬파인의 ‘카우와아우와’라는 기둥을 이용하여 신적인 존재 ‘눔바쿨라’와 소통하는 예시를 인용하였다. 이 성스러운 기둥은 그들의 세계를 떠받들고 하늘과의 교류를 보증한다. 성현은 무형태적이고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속된 공간의 유동성에 고정점을 투사하고 카오스 속에 하나의 중심을 투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지평에서 다른 지평으로의 돌파를 가져오는 동시에 위 혹은 아래로 가는 출구를 만든다. 어떤 장소를 정화하는 것은 그 장소를 위로 열리게 하며, 이는 천상과 교류를 할 수 있는 하늘로 열린 통로가 된다. 따라서 공간의 성현, 정화는 우주 창조에 대응하며 우주론적인 가치를 지닌다.
인간들이 살고 있는 ‘우리의 세계’는 천상과 가장 가깝게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늘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땅이며, 높은 땅이다. 성스러운 공간은 항상 중앙, 중심(신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이것의 예시는 중국 황제의 수도, 예루살렘 신전, 이란의 국토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종교적 인간은 가능한 한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의 건설 혹은 제작은 우주 창조를 전형적인 모델로 가지게 된다. 이러한 형식과 관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발견되고 있다. 종교적 인간은 이러한 성스러운 세계 속에서만 존재에 참여하고, 진정한 실존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지역에 정착하고 거주하는 것은 우주 창조의 반복, 곧 신들의 작업을 모방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거주하기로 선택한 세계를 창조할 책임을 맡게 된다. 그는 혼돈을 우주화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작은 코스모스를 신들의 세계처럼 만듦으로써 성화한다. 종교적 인간은 ‘신의 세계’에 깊은 향수를 느끼며 태초에 우주가 창조주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났을 때처럼 순수하고 성스러운 우주에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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