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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에 대한 열강들의 이해관계
크림 전쟁은 동방을 향한 유럽 세력의 팽창정책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그렇기에 크림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동방에서 열강들의 이해관계는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경제적, 인종적, 종교적 이해관계로 인해 동방으로의 진출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러시아는 얼지 않는 부동항을 찾아 나서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동방과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오스만 터키 세력범위를 설정하였고, 1774에는 ‘쿠츠크-카이나르지 조약’을 통해 흑해의 자유로운 항행권과 콘스탄티노플에 그리스 정교회 설립권 등을 획득하여 터키에 간섭을 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함께 오스만 터키의 서진을 저지하였으며, 남진을 이유로 발칸 지역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발칸 지역은 러시아와 영토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민족주의 확산을 두려워하였기에 정치적 이해관계도 존재하는 지역이었다.
영국은 이들과 달리 러시아의 서진 및 남진을 봉쇄하고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오스만 터키 제국의 현상 유지를 원했다. 프랑스 또한 러시아의 봉쇄에 대해 영국과 공동보조를 취했다.
(2) 크림 전쟁 이전 동방문제 - 그리스 독립 문제, 이집트 문제
이제 크림 전쟁 이전의 동방문제를 살펴보자. 우선 1815년 그리스는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의 후원자인 러시아가 발칸에 진출할 기회를 잡았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우려를 감안하여 베로나 회의(1822)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그리스의 합법적 지배자가 오스만 터키이며 러시아는 독자적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러시아로부터 받아냈지만, 러시아는 태도를 돌변하여 그리스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 개최를 요구한다.
그리스의 독립은 오스만 터키의 쇠퇴와 더불어 유럽 강국들의 영향력 변화와 관련이 있었기에, 유럽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그리스를 자신의 보호지역으로 만들려는 야망으로 러시아 독립에 찬성했고, 영국은 그로 인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며 그리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지만, 터키의 종속국으로 남겨두는 것을 제안했다. 현상을 유지하되 자치권을 인정하라며 터키의 양보를 촉구했지만, 터키는 러시아와 영국의 입김을 사전에 거부한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민족주의 확산을 우려하며 발칸 지역의 현상 유지를 원했기에 그리스 독립에 반대하고 터키의 지속적인 그리스 지배를 찬성하였다. 프랑스는 영국과 입장을 같이 하여 그리스 독립에 반대하였다.
터키는 이집트와 연합하여 그리스의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고, 이에 맞서 러시아가 그리스를 돕고자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단독 개입을 우려한 영국은 그리스의 속국 지위를 유지하되 자치권을 허용하자는 영-러 의정서(1826.4)를 체결하고, 러-터간 아케르만 조약(1826.10)을 제안하며 중재한다. 그러나 이집트 진압군이 승전할 것 같자, 터키는 중재안을 거절한다. 이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는 런던조약(1927)을 맺고 터키가 중재안을 수락하지 않을 경우,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겠다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를 다시 터키가 거부하자 3개국은 이집트-터키 연합함대를 대패시켰고, 러시아의 해전 참전에 대한 복수로 터키가 아케르만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자, 러시아는 터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결국 러시아-터키간의 전쟁이 1828년 4월 발발하는데, 붕괴 직전의 오스만 터키 제국은 협상에 응하게 된다. 그 결과 ‘아드리아노플 조약’(1829)이 체결되어 러시아는 해협의 자유로운 통행권을 얻고 세르비아, 몰다비아, 왈라키아를 자신의 보호령으로 얻게 된다. 아드리아노플 조약은 아케르만 조약의 복원인 동시에 강화로 볼 수 있다. 조약 체결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 지역에서 러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제약하고자 그리스를 완전 독립국으로 두기로 1930년 런던의정서에서 결론지었다. 그리스 독립은 민족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며, 러시아의 남진을 유발하였고 사실상 그리스의 독립은 러시아의 후원 속에서 이루어졌기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오스만 터키의 쇠락으로 인해 이집트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이집트는 시리아를 보상으로 요구하며 터키에 대항하였다. 러시아는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유지하기 위해 오스만 터키의 현상 유지를 원했고, 터키를 지원하였다. 오스만 터키가 러시아에 의존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영국과 프랑스도 개입한다. 이집트와 터키의 분쟁이 영-프와 러시아 간의 분쟁으로 비화될 위험이 생기자, 터키는 전쟁이 자신의 영토에서 일어날 것과 자신의 영토가 분할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시리아 관할권을 이집트에 넘겨주라는 프랑스의 중재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러시아는 철수하면서 터키와의 동맹관계를 체결한다. ‘운키아르 스켈레시 조약’(1833.7)을 통해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흑해와 러시아 역내로 들어오는 것을 터키가 폐쇄하며 막기를 약속한다. 이것은 상호안보방위 조약으로, 러시아의 발칸 진출 가능성을 증가시켜준다. 또한 오스트리아와 ‘뮌헨그라츠 합의’(1833.9)를 맺으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경쟁관계가 군사적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1939년에 터키는 시리아를 공격하지만, 다시 패배하고 만다. 이에 개입한 프랑스는 시리아를 자신의 보호국인 이집트에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영국은 시리아를 터키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시아 문제에 있어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이었기에, 시리아 반환 문제에서는 프랑스가 물러나고, 알렉산드리아협정(1840)을 통해 이집트는 시리아에 대한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이는 북아프리카 일대에 대한 영국의 영향권을 인정, 확인 받은 것이다.
또한 영국은 오스만 터키와 ‘해협조약’(1841)을 채결하여 오스만 제국의 현상을 유지시키는 동시에,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진출 야심을 무력화 시켰다. 러시아와 터키의 두가지 조약(아드리아노플, 운키아르 스켈레시 조약)은 러시아의 남진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해협조약은 그 조약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으로, 이 지역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며 러시아를 봉쇄하고 위협하기 위한 목적이다. 만약 러시아가 터키에 영향을 끼치면, 영국과 러시아의 충돌이 불가피 하게 되는 것이다. 해협조약은 결국 크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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