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4. 23.

    by. 지지_

    (3) 크림 전쟁의 과정과 열강들의 노력, 충돌

     이전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터키는 유럽의 열강들의 여러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역이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얻은 강력한 군대를 통해 지중해로의 남하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주위 여러 국가들에게 위협을 주었다. 또한 터키 일대는 무역과 식량 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이기에 해당 해협의 지배권을 누가 갖느냐는 매우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성지관할권에 관한 프랑스, 러시아, 터키 간의 갈등은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1851 프랑스는 터키에 성지관할권을 요구하고, 터키가 1852 이를 승인한다. 이것의 배경에는 국내적 기반 강화와 대불 봉쇄로 대표되는 체제를 붕괴하기 위한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야망이 드러난다. 러시아는 1774 쿠츠크 카이나르지 조약에 따라 프랑스에게 성지관할권을 철회하라며 다뉴브 공국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점령을 선언하고 병합을 시도한다. 그러자 해협조약을 통해 약속 받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터키가 1853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크림 전쟁이 시작된다.

     열강들의 입장은 이러하다. 러시아는 쿠츠크 카이나르지 조약의 권리 요구에 더해 조약의 확장을 원하였으며,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 저지를 목적으로 터키의 현상 유지를 위해 터키를 도왔다. 프랑스는 체제 전복과 프랑스의 패권 부활, 그리고 대러 봉쇄로 국제적인 봉쇄 타겟이 바뀌기를 원하며 영국과 공동보조를 취한다. 오스트리아는 자신 제국의 동요를 막기 위해 현상 유지를 원한다. 그렇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에는 참여하되, 군사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한다. 이는 뮌헨그라츠 합의를 깨뜨린 것으로, 러시아의 분노를 야기하고 후에 국제적 고립의 화근이 된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입장을 추종하여 무관심적인 중립을 취한다.

     영국과의 전쟁에 자신이 없었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원했기에 러시아의 요청으로 오스트리아의 주선과 프랑스에 의한 비엔나 각서(1853.7) 마련되지만, 중재에 실패한다. 터키는 1853 10 영국을 믿고 러시아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1855 11 연합군의 전세가 유리해지자 프랑스-오스트리아 평화예비안이 마련된다. 예비안의 주된 내용은 러시아의 봉쇄와 유럽 진출을 막는 것이 목적이다. 결국 1856 2 빈에서 교전국 대표들이 평화예비안에 서명하였다.

     크림 전쟁이 종식되자 파리강화회의에서 국가들은 흑해 비무장을 선언하며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차단하였고, 다뉴브 지역에서의 러시아 지배권을 상실시켰다. 터키의 영토 보전과 독립이 보장되었고, 쿠츠크 카이나르지 조약이 폐기되어 러시아의 터키 간섭이 상실된다. 또한 다뉴브 강의 자유 항행을 보장하여 일국, 특히 러시아의 지배를 방지하였다.

     

    (4) 크림 전쟁의 결과와 외교사적 의미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으며, 동시에 영국 주도의 패권질서의 도전국으로 부상하던 러시아를 패배시켰다. 결과 영국의 패권적 지위가 강화되었고, 팍스 브리트니카의 질서가 강화되어 식민지배 진출이 유리해졌다.

     러시아는 프랑스 이후 대륙의 강자였지만, 남진 정책의 좌절로 국제적 위신이 추락하였다. 러시아는 지중해와 발칸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프랑스는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였고, 국내정치적 기반이 취약하던 나폴레옹 3세는 지지 기반을 강화하게 된다. 또한 대불 봉쇄가 끝나게 된다.

     오스만 터키 제국은 영국의 보호 아래 영토를 보존하고 독립을 확보할 있었다. 또한 혹시 있을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내놓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점령함으로써 러시아를 배신하고, 크림 전쟁에 참전하지 않아 러시아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로부터도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국제적 위신이 저하되고 국제적 고립을 받게 되어 고립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국가적 목표가 되었다.

     사르디니아는 참전을 통해 후에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된다. 또한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약화로 인해 통일을 성취할 기회를 얻게 되며, 중립을 지킴으로 인해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 이는 후에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프로이센의 통일전쟁에서 러시아의 우호적 중립을 유도하게 된다.

     크림 전쟁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을 위한 국제적 환경을 조성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상대적 세력 약화로 이탈리아와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얻게 것이다. 또한 크림 전쟁은 러시아에 대한 예방 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점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최초의 봉쇄 전쟁이라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으로의 팽창이 좌절되자, 팽창의 방향을 아시아, 특히 중국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은 일본이 위협을 느끼게 하였으며 아시아에서도 본격적인 국가들의 진출과 팽창 정책의 바람이 불게 된다.